시인 김정란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명예교수가 415총선 후 16일 페이스북에 대구는 독립해서 일본으로 가시는 게 어떨지. 소속 국회의원들과 지자체장들 거느리고. 귀하들의 주인나라 일본, 다카키 마사오의 조국 일본이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후 이에 논란이 일자 글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글이 논란 되자 같은날 해당 글을 삭제하고 대구선거결과 관련해서 제 발언에 지나친 점이 있었다. 사과한다. 대구시민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려깊지 못한 발언이었다.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시인 김정난은 1953년 서울 출생으로 올해 68세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평양 출생인 그의 아버지는 영락교회를 세운 장로였고 어머니는 전도사였다.
김정난은 전라북도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프랑스 그르노블 Ⅲ 대학교에서 '신화 비평을 원용한 이브 본느프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정난의 남편 서정기는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 김현의 애제자이자 시인 황지우의 친구이다. 1982년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따낸 서정기를 따라 그르노블에서 5년을 살았다. 서정기와의 사이에 아들 두 명을 두었다.
대학 졸업 후에 CBS 아나운서로 활동하였고, 에어프랑스 대한민국 지사에서도 근무했다. 그 후 개인적인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었고, 1982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유학생활을 하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 1987년에 상지대학교 시간강사가 되고 1989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상지대학교에서 교수협의회 폐지를 놓고 재단과 교수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을 때 교수협의회 폐지 반대에 앞장섰다. 1991년 상지대학교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였으나, 이후 당시 상지대학교 재단이사장 김문기가 비리 혐의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김정란도 교수직에 복직되었다. 복직될 무렵 번역했던 《람세스》의 성공으로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이후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문학계 등을 비판하는 기고 활동에 나섰다. 한겨레, 국민일보, 한겨레21 등에 기고하면서 문학의 상업주의나 조선일보와 유착된 일부 작가들을 비판했다.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학자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논객으로서 사회적 발언도 하였으며, 작가로서 외국 소설을 번역하고 신화와 관련하여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김정난은 1976년에 시인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으며, 《현대시세계》에 평론 〈이성복론〉을 발표하여 평론가로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문학, 평론의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평론을 많이 썼다. 국민일보 기고글 에서는 "한국문학은 빠른 속도로 소비문화에 포섭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한겨레 기고글에서는 "대한민국의 문학계가 작품을 팔아야 출판사가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출판 논리를 문학 논리로 위장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의 절정은 1999년 출간된 공저 《조선일보를 아십니까?》의 제2부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이었다. 여기서 신경숙, 은희경 등 유명 작가와 문학동네 등 유명 출판사와 조선일보가 유착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시집 《스타카토 내영혼》은 본래 출판이 예정되어 있던 문학동네가 아니라 문예중앙에서 출판되었다.
김정란 시인 고향 나이 상지대 교수 대구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