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안두희 김구 살해 이유 배후 이승만 박기서 정의봉 후손 가족

레인맨00 2019. 9. 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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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가 재방송되며 안두희에게 관심이 쏠렸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 후 오로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당시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했을 당시 백범 김구의 비서 선우진의 회고록 중에는 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맞고 군복 차림의 괴청년들이 안두희를 데리고 사라지기까지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은, 정말 순식간에의 일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안두희는 4.19 혁명 이후 민족정기회복을 부르짖는 청년들에게 쫓겨다녔다. 칼부림과 매질도 당하며 잠적생활을 해야겠다. 안두희는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살해했다고 밝혔지만 이후 부인했다.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는  김구 선생은 70년 전 이 장소에서 서거하셨다. 선생을 누가 죽였는가라고 물으며 “물론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셨지만 그 배경에는 이승만이 있고, 미국이 있고, 더 나아가 통일운동을 반대했던 반민족 세력들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안두희는 검찰에서 김구가 군대를 자신을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려 하기에 응징한 것이라고 진술했으나 이승만 사주를 받아서 김구를 살해했다는 설이 더 유력한것으로 보고 있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에 경교장에 찾아가 총으로 김구를 암살했다.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그리고 1951년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이후 안두희는 군납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엄청남 돈을 벌어들였다.그러나 잇단 테러와 위협 때문에 이사를 자주다녔고 미국 이민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1996년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박기서에게 죽임을 당한다. 박기서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글자를 적은 후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를 때려죽였다.

안두희는 1965년 12월 21일 곽태영(1936-2008)에게 강원도 양구에서 첫 테러를 당한 이래 31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달리던 끝에 최후를 맞았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는 살인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되어 1년 3개월 후 풀려났다

당시 대법원에 따르면 박기서의 행동이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이는 박기서의 행동이 법질서 전체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옹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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