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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최재형 독립운동가 후손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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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선을 넘는 녀석들’ 13회 방송 후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최재형 선생. 연해주 독립운동계 대부 최재형은 1년에 136억을 독립자금으로 바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독립운동으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17일 방송되는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이하 ‘선녀들’)-리턴즈’ 14회에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향한 ‘선녀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그곳에서 우리에게 잊혔던 독립영웅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와
최재형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든든한 후원자였다는 것, 두 영웅의 목숨 바친 독립운동 이야기가 공개됐다.

이런 가운데 최재형 선생의 순국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찾아간 선녀들은 이곳에서 묘지도 없이 길바닥에 묻힌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참담한 모습에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여기가 맞느냐고 되묻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최재형은 1860년대 말 고려인 최초의 이민으로,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은 최초의 고려인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동포들의 권익 뿐만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 및 독립 운동 특히 무장 투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최재형은 해외 최대의 독립 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 3천 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 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 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1919년 망국 이후 신한촌에서 상해 임시 정부보다 한달 빠른 가장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 국민 회의'라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대표는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던 이상설이었고, 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도 최재형이다. 그는 1920년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체코와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입해 공급하며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의 한인촌을 급습해,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켰고 최재형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최재형은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당시 일본은
최재형 선생을 고문후 재판없이 즉결 처형하고  시신을 찾지 못하게 길바닥에 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부는 순국 42년 만인 1962년 최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4대손인 일리야 최(Ilya Tsoy)가 인천대에 입학했다.그는 지난해 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행사를 통해 방한했다가 인천대 측의 제안으로 어학원에 들어오게 됐다.

최재형 독립운동가 후손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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