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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판문점 도끼만행 총격사건 장명기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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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선을 넘는 녀석들’판문점에 가다’ 특집에서 대성동 마을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판문점 총격사건이 다시 재조명 됐다.


도끼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에서 북한군에 의해 자행된 사상사건으로 이때까지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과 유엔군의왕래가 자유로운 가운데, 한국군 초소의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과 한국군에게 북한군이 기습하여 미군장교2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은사건이다.


당시 북한군은 나무가지를 치던 도끼로 아서 조지 보니파스(Arthur George Bonifas)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Mark Thomas Barrett) 중위 등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파괴하고 물러갔다.


이 사건으로  남북한은 준전시상황까지 이르렀고 8월 21일 새벽 7시 데프콘 2호(전쟁돌입상태)하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다. 미국의 강경한 대응에따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과에 따라 상황은일단락되었으나, 공동경비구역은 남과 북으로분할되었으며, 남북의 경색 국면도 일정 기간계속되었다.





판문점 총격사건은 1984년 11월 23일 11시 30분 경 당시 소련의 관광 가이드 바실리 마투조크가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면을 찍던 중 갑자기 건물과 건물사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당황한 북한 육군 병력이 그의 월남을 저지하고자 권총을 발사하며 경고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곧바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150m까지 침범, 자유의 집 앞 연못 까지 내려왔다.



이 때 군사분계선을 침범한 북한 병력은 총 17명이었으며 연못을 중심으로 30여분간의 총격전이 이루어졌다.



북한군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마투조크는 무사하였으나 이 총격전으로 인해 한국 육군은 카투사 장명기 일병(상병 추서)이 전사했고, 미 육군은 1명 부상당했으며, 북한 육군은 확실하지 않으나 2명 사망, 2명 부상 설과 3명 전사, 5명 부상 설이 있다.

북한군 병력들은 피해가 커지자 총격전을 중단한 뒤 부상,사망자를 수습해 돌아가겠다고 교전 중단을 청했고 유엔군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유엔군의 감시 속에서 북한군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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