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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적명스님 입적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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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한국 불교계의 대표 선승으로 평가받는 경북 문경 봉암사의 적명스님이 이날 오후 4시 36분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근처 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향년 96세로 입적했다.


적명스님은 오전에 다른 승려들과 함께 사찰 뒤 희양산에 올라갔는데, 내려오는 길에 일행과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오후 3시 43분께 산에 간 이후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사찰 관계자의 신고를 접수한 뒤 수색을 벌여 적명 스님을 발견했다. 119구조대가 발견할 당시 스님은 심장이 멎은 상태였다. 경찰은 스님이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적명스님은 1923년 제주에서 태어나 나주 다보사 우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는 영축총림 통도사 선원장, 고불총림 백양사 선원장,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를 맡은 바 있으며 2007년부터는 조계종 종립선원인 봉암사 수좌로 지내왔다.

평생 선원과 토굴에서 참선 수행에 집중해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으로도 평가받는다.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로 참선 수행도량인 봉암사에서 큰 어른을 뜻하는 조실 요청을 마다하고 수좌로 있으며 후학을 양성해 왔다.


적명 스님의 할아버지는 근대 제주불교의 어둠을 밝힌 김석윤 스님이다. 김석윤 스님은 1934년 제주 최초 선원이었던 제주포교소 월정사를 창건하는 등 해방 후 제주불교혁신회 고문으로 위촉, 남은 생을 불교의 정통성 회복에 힘쓰다 지난 1949년 8월 입적한다. 일제의 감시망에도 불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제주불교 발전에 헌신해 온 삶이 적명 스님과 닮았다.


이어 김석윤 스님의 뜻을 받든 3명의 자식들은 출가를 하게 되는데 둘째 김성수 스님, 셋째 김인수 스님, 넷째 김덕수 스님이다. 그리고 손자로 적명 스님(봉암사 수좌)과 외손녀인 제아 스님(선흘 여련암)이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거부였지만 할아버지인 김석윤 스님으로 인해 집안 살림은 쪼들렸다. 그로 인해 오현중 야간을, 오현고는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고학을 해야만 했다. 21세에 출가했다.


스님의 친동생인 김동호(전 신제주초 교장) 씨의 회상에 따르면 “스님은 고학을 하면서도 공부를 정말 잘 했는데 당시 육사를 지원할 정도였다”며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 꿈을 포기하고 출가자의 뜻을 세운 후 교회와 성당 등을 두루 다녀보시고는 ‘어릴 적 맡은 향내음이 미어져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하시곤, ‘능엄경’ 책을 읽고는 출가에 대해 확고해 지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봉암사 대중들이 대중공사를 해 나를 데려오자고 이야기 했나봅니다. 그리곤 기기암에 있던 나를 찾아와 봉암사에서 조실로 자리해달라고 거듭 절실하게 예의 부탁을 하더이다. 여러 번 거절 했는데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조실 이름 달 것은 못되고 그냥 수좌로 있겠다.’ 하고 봉암사에 오게 됐습니다.”


봉암사에 와서야 대중들의 간청으로 부처님 오신 날 참석 대중을 위해 겨우 정식으로 법상에 올라 법문을 했다는 적명 스님은 자신이 아는 것은 다른 스님들도 거의 다 알고 있기에 특별하게 따로 할 말이 없어 그동안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어린시절 방황하다 고등학생이 되고 ‘이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부터 옷도 단정하게 입고 걸음걸이에 눈빛까지 고치려 신경 썼고, 공부도 열심히 해 제주도 도내에서 학업으로 손 꼽힐 정도로 좋은 성적을 얻게 됐다. 그런데 꿈을 위한 학문을 전공하고자 대입 재수를 하던 21살의 어느 날, 문득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민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라산에 올라가 ‘과연 출가가 나에게 맞는 결정인가.’라는 고민으로 일주일씩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결국 몇 달간의 고민 끝에 인생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제가 출가하면 죽겠다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무덤 잘 만들어드리고 출가하겠습니다.’라고요. 출가 결심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세월이 지나고는 어머니도 좋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어린 청년은 그 길로 나주 다보사에 찾아가 우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게 됐고, 15년의 토굴생활을 제외하면 전국 선방은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수십 년 동안 전국의 제방선원을 다니며 수행정진에 힘써 왔다.

한편 봉암사는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오신날에만 산문을 열고 1년 내내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 참선 수행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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